도움이신 마리아 발현, 스폴레토
"이 아이를 내게 주십시오."
1870년, 로마를 방문 중이던 돈 보스코는 당시 교황 비오9세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오반니 타타 고아원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한 아이를 보며 원장 신부에게 한 말이다. "안 됩니다. 돈 보스코, 이 아이에 대해 이미 저희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원장신부는 대답했다. 소년의 이름은 페데리코 치온키(Federico Cionchi)로 당시 열세 살이었다. 이후 아이는 솜마스키 수도회에 입회하여 1923년 66세로 겸손한 수도자의 일생을 마쳤다. 그에 대한 시복시성 과정이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가경자이다.
우리가 이 Cionchi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오늘 도움이신 마리아 대축일과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Cionchi는 1857년 4월 15일, 스폴레토의 산 루카 디 몬테팔코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돈 보스코의 교황이라 일컷는 비오9세는 1827년 5월부터 1832년 12월까지 스폴레토의 대주교를 역임했다.
Cionchi가 다섯 살이던 어느날,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누나 로사와 함께 양을 방목하는 들판에서 놀고 있었다. 그곳에는 폐허가 된 성당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폐허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섰고, 치온키는 미소 지으며 자신을 부르는 성모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에 매료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치온키는 어머니에게 "엄마, 저기(폐허 성당을 언급하며) 한 여자가 저를 불렀어요"라고 말한 다음 누나 로사에게 "진짜지, 로지나야?"라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그럼 그분이 너에게 뭐라고 했어?"라고 물었다. "그분은 저에게 '리게토(치온키의 애칭), 착하구나! 그분은 나를 바라보며 웃었어요." 어머니는 리게토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아이들의 환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침묵을 명령했다.
어느 날 어머니 카타리나는 아침 일찍 리게토가 아직 침대에서 자고 있을 때 잠깐 외출했다. 잠에서 깨어난 리게토는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고 처음으로 혼자서 옷을 입고 '아름다운 여인'에게로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이 보이지 않자 사방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눈은 창문으로 향했고, 허물어진 성당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뛰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잠시 후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왜 이렇게 일찍 허락도 없이 집을 나갔니?"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리게토는 미안한 표정으로 "성모님께 다녀왔어요."라고 답했다. "우리집에도 성모상이 많이 있는데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성모님을 뵈어야 하지?" "저기, 엄마, 저에게 '리게토야'라고 말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보여요. 제 손을 잡고 잘 지내라며 자주 방문하라고 말해요. 그래서 그곳으로 간 거예요."라며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을 손으로 가리켰다.
엄마 카타리나는 오랫동안 아들의 일을 비밀로 간직했지만, 어느 날 친구인 안젤라 치안프로니에게 털어놓았다.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서 성모님을 봤다는 리게토의 말을 믿어도 될까요? 그분이 우리 얘기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것을 누가 믿겠어요?" 그러자 시안프로니는 "성모님과 성인들은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아이들은 순수한 영혼이며 하늘의 자비를 끌어당긴답니다."
성모님이 리게토에 발현하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루카 시골 지역 전체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순례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순례자들은 당연히 치온키를 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고, 리게토는 그들의 호기심을 기꺼이 충족시켜 주었다. 아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주 손을 잡아주었다고 주장했기에, 순례자들은 "성모님이 어느 쪽 손을 잡으셨니?"라고 묻곤 했다. 아이는 오른손을 보여주며 "이 손이었어요."라고 했다. "아니, 왼쪽 손일 것 같은데"라고 순례자들이 농담을 하자 리게토는 "아니, 오른쪽 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틀렸구나, 얘야. 널 잡은 손은 왼쪽 손이야."라고 주장했다. 리게토는 화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아니요, 이쪽입니다."라고 확고하게 대답하고, "성모님께서 내 손을 잡으셨지, 아저씨 손을 잡으신 게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소문은 스폴레토 대주교인 지오반니 바티스타 아르날디(Giovanni Battista Arnaldi)의 귀에 들어갔고, 대주교는 1862년 5월 8일 발현 장소를 방문했다. 아르날디 주교는 이때 Auxilium Christianorum(그리스도인의 도움)이라는 칭호를 붙여 발현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를 썼다. 도움이신 마리아의 기념일로 널리 지내던 5월 24일, 대주교는 다시 발현 현장으로 와 성 바르톨로메오의 작은 성당 근처에 직접 세운 나무 제단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참고 페이지)
같은 해, 1862년 토리노 발독코에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전을 착공하는 것으로 돈 보스코의 영성과 삶에 도움이신 마리아가 개념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