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계절, 5월에는 갖가지 꽃향기들이 온 누리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향기의 주인공 중 하나는 자스민일 것이다. 특히 밤새 꽃잎에 머금고 있던 물기를 아침 햇살로 기화하며 발산하는 강렬한 내음은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탈리아말로 '젤소미노/나'는 자스민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렇다. 이미 눈치 챈 분들이 있겠는데, 오늘은 지난 70년 동안 세상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은 다른 자스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한없이 작은 여인, 젤소미나를 말하고 싶다. 페데리코 펠리리 감독의 영화 '라 스트라다'(La Strada: 길)의 여주인공 말이다. 자스민이 품어내는 향기보다 훨씬 더 치명적일 만큼 아련한 매력을 담고 있는 스토리와 백치미의 원조로도 손색이 없는 줄리엣타 마시나의 연기가 사람의 감정을 사로잡고 매양 누선을 자극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나고, 해변에서 시작해서 해변에서 끝나는 영화입니다. 특히 그 여인의 삶이 가진 의미를 알게 해주는, '조약돌'을 두고 '세상에 하찮은 돌맹이라도 쓸모가 있대. 너도 그래! 뭔가 쓸모가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외줄타기 광대(Il Matto, 리터드 베이스하트 역)의 장면이 제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영화 개봉 70주년(1954년 작)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한 프로그램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짧게 인터뷰하면서 한 말이다.
'길'이라는 짧은 제목처럼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고 있다. 오토바이 포장수레를 끌고 이마을 저마을 떠돌며 쇠사슬을 끊는 차력으로 살아가는 잠파노와 1만 리라에 팔려와 그를 따라다니며 조수역할을 하는 젤소미나. 표면적으로는 부부라고 소개하면서도 남자는 젤소미나를 부려먹기만 하고 거칠게 학대하기를 일삼는다. 젤소미나는 원망하며 떠나려고 하지만, 오히려 잠파노에 의지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칠고 투박한 잠파노, 바보같고 순종적인 젤소미나, 이러한 어울리지 않는 가난한 커플이 이어가는 여정은 굉장히 고달프고 해답이 없다.
애절한 사랑도, 애증도, 서로가 의지하는 심리적 접점도, 그렇다고 이별도 없는 두 사람. 잠파노의 살인을 목격하고 정신 이상이 된 젤소미나를 길에 버리고 떠날 때까지 그들의 갑갑한 동행은 계속 된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녀를 유기한 지 몇 년이 흐른 뒤,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은 잠파노가 술취한 광인이 되어 바닷가에서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 삶이 지닌 가치와 왜소함, 절대자를 갈구하는 인간의 허무함을 표현하며 관객들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겨 놓는다.
"펠리니는 가장 왜소한 사람들 바라보는 시선에게 전례없는 빛을 줬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마지막 자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그런 이웃의 현실을 바라보는 소중한 시선을 보존하라고 초대합니다." 신 사실주의(Neorealismo)의 거장 펠리니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극찬이다.
자스민 향기가 강하게 번지는 5월에, '젤소미나의 테마' 트럼펫 음율이 귓가를 맴도는 여운 속에서 인간의 비극, 나약함, 존엄성 등을 되집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시청을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