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2026. 1. 19) –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양 떼를 버리지 않고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선택했던 ‘살레시오회의 영웅적인 순교자’ 엘리아 코미니(Fr. Elia Comini, SDB) 신부가 복자품에 오른다. 교황청은 지난 1월 2일, 교황 레오 14세가 하느님의 종 우발도 마르키오니 신부(교구 사제), 돈 엘리아 코미니 신부(살레시오회), 마르티노 카펠리 신부(데혼회)의 시복식을 2026년 9월 27일 볼로냐에서 거행하기로 승인했음을 통보했다. 시복식은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이 주례할 예정이다.
“불의 학교”에서 자라난 소명, 눈물 속의 첫 서원
1910년 5월 7일 볼로냐 지방 ‘마돈나 델 보스코(숲의 성모)’ 근처에서 태어난 엘리아 코미니는 태어난 다음 날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성소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청년 시절 돈 보스코를 직접 만났고 그에게서 사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던 피덴치오 멜리니 몬시뇰의 ‘불의 학교(school of fire)’에서 사목의 기초를 배웠다. 1923년, 멜리니 몬시뇰의 인도로 형 암레토와 함께 피날레 에밀리아의 살레시오회로 보내진 엘리아는 돈 보스코의 교육적 카리스마를 깊이 흡수했다.
그의 양성기는 시련과 은총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1925년 10월 1일 수련자가 된 엘리아는 첫 서원을 불과 며칠 앞둔 1926년 9월 14일, 아버지를 여의는 큰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며 10월 3일 첫 수도 서원을 발했다. 1931년 5월 8일 종신 서원을 한 그는 , 1935년 3월 16일, 24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밀라노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는 학생들에게 “병아리를 품은 암탉”처럼 다정하고, 음악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훌륭한 교사이자 영적 아버지였다.
놀랍게도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했다. 1929년 신학생 시절 일기에 “주님, 저를 속죄의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라고 적었고, 1935년에는 “사제 성소에 실패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순교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준비된 봉헌이었다.
양 떼를 위해 사지로 걸어 들어가다
1944년 여름, 전운이 감도는 고향 살바로로 돌아온 돈 엘리아는 운명의 9월 29일 아침, 나치 SS가 자행한 ‘크레다’ 학살 소식을 듣는다.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형제들에게 주님을 모셔다 드려야 한다”며 동료 사제 마르티노 카펠리와 함께 성유와 성체를 챙겨 학살 현장으로 달려가는 ‘의식적인 선택’을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거룩한 전례’
체포된 두 사제는 사제의 징표를 빼앗기고 탄약 상자를 짐승처럼 짊어진 채 산을 오르내리는 수모를 겪었다. 1944년 10월 1일 저녁, 피오페 디 살바로의 ‘카나피에라 저수조’ 앞에서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 나치는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죽음의 행진을 시켰지만, 돈 엘리아는 손에 성무일도를 든 채 호칭 기도를 노래하며 그 공포의 시간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장엄한 전례’로 변화시켰다. 총구가 불을 뿜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한 남자를 가려 구하고는 “자비를(Pietà)!”이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시신은 레노 강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며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돈 엘리아의 영웅적인 사랑은 영원히 남았다. 살레시오회 시복시성 청원담당관 피에르루이지 카메로니 신부는 “돈 엘리아와 동료 순교자들은 착한 목자의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양 떼를 위하여 그리고 양 떼와 함께 목숨을 바친 평화와 화해의 장인들”이라고 강조했다.
엘리아 코미니 신부에 대한 시복식은 폭력과 증오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거룩한 전례'의 참된 영광을 증거한 살레시오 사제의 표상을 다시금 확인하는 감동적인 자리가 될 것이다.